[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경남 고성
- 공룡,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는 저 멀리 경상남도 남부 해안에 터를 잡은 고성(固城) 고을이 우리를 불러들이는 강력한 자석이다. 우선 고성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우리 민족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두 번씩이나 대승을 거뒀던 당항포를 거느리고 있는 고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 산줄기로 살펴보면 고성 북쪽으로는 봉대산(409m)~백운산(391m)~대곡산(542.9m)~무량산(581.4m)~용암산(399.5m)~깃대봉(526.6m)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 분수령이 지난다. 이중 대곡산에서 ‘통영지맥’이 남서류하며 고성읍 한가운데를 나지막하게 흐르다 불쑥 벽방산(650m)을 일으키는데, 여기서 한 갈래는 북으로 뻗어 거류산(571m)을 세운 뒤 당항의 장군산(263m)에서 세력을 다하고, 또 다른 갈래는 남으로 뻗으며 천개산(525m) 지나 통영의 천암산(258m)을 세운 뒤 한려수도 앞바다로 잦아든다.
-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있는 당항포 숭충사에서 바라본 당항만.
- 이 ‘통영지맥’으로 인해 바다로 돌출한 땅덩어리를 흔히 고성반도라 부르는데, 이 반도의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통영을 제외하곤 대부분 고성땅에 속한다. 이렇게 생긴 고성반도는 남부는 자란만과 고성만에, 동부는 당항만과 당동만에 면해 있는데, 앞바다의 수심이 비교적 깊은 편이라 크고 작은 항만이 잘 발달되어 있다.
정말로 예전엔 고성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흔히 ‘진주라 천릿길’이라 했는데, 이는 한양에서 진주까지의 거리가 그만큼 멀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성은 진주보다도 남쪽에 있으니 한양에서 접근하려면 고성은 정말로 머나먼 오지였을 것이다. 이는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었다는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한다 해도 그 이후 구불대는 2차선 국도로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서울서 5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고성을 관통하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2005년 12월에 완전 개통되면서 확 달라졌다. 이젠 오로지 고속도로만 편하게 달려도 고성의 품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 ▲ (왼쪽) 제법 운치가 있는 옥천사 담장. (오른쪽)지역에서 출토되는 자연석을 쌓아 독특한 경관을 보여주는 학동마을 골목길.
-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에서 고성의 첫 관문격인 연화산 나들목으로 나오면 길은 자연스레 옥천사(玉泉寺)로 이어진다. 고성 사람들이 고성의 진산인 거류산과 더불어 가장 아끼는 연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이 절집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이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태백산 부석사 등과 함께 세운 화엄 10대 사찰 중 하나. 절집 이름의 유래가 된 옥천(玉泉)은 대웅전 오른편 팔상전 옆에 있는데, 수각(水閣)을 지어 정성스레 보호하고 있다.
근래에는 조계종 종정과 총무원장을 지낸 청담(靑潭·1902-1971) 스님이 머리를 밀고 출가한 절집으로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자방루 앞마당 왼편에 청담의 사리탑과 탄허 스님이 직접 짓고 쓴 탑비가 있다. 스님의 사리탑은 이외에도 노년에 주석하시던 도선사와, 6·25전쟁 무렵에 10년 동안 수행하던 문수암에도 있다.
옥천사에 전하는 문화유산 중 1252년(고려 고종 39)에 제작된 임자명 반자(壬子銘 飯子·보물 제495호)가 가장 눈길을 끈다. 반자란 절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타악기로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 데 사용한 쇠북을 말한다. 금속으로 만들었기에 금고(金鼓)라고도 한다. 현재 보장각이라는 건물엔 이 반자를 비롯해 1701년에 주조된 대종, 1816년에 제작된 청동은입사 향로, 1866년에 강원 교재로 판각한 금강경 목판 등 120여 점의 문화유산이 보관되어 있다.
옥천사에 이처럼 많은 문화재가 있었던 까닭은 그만큼 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와 접해있는 덕에 진주의 권문세가들이 시주를 많이 했고, 진주목과 경상우도 감영, 삼도수군 통제영, 고성현 등 관아의 도움도 적지 않게 받았다. 옥천사 홈페이지에 소개된 기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엔 소작을 준 사찰답에서 무려 1년에 1천 석 이상을 거둬들였고, 사찰 소유의 임야를 지키는 산지기도 무려 5~6명이나 될 정도였다 한다. 이런 부를 바탕으로 1721년(숙종 27)에 대종(大鐘)을, 1764년(영조 40)에 자방루를, 1774년(영조50)에 대웅전 후불탱화를, 1808년(순조4)에 괘불을, 1864년(고종 1)에 대웅전을 각각 조성하였다.
또 1743년(영조19) 옥천사에 주둔하던 승군의 정원은 무려 34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 옥천사의 넓은 앞마당은 승군들의 연병장이었으며, 자방루(滋芳樓)는 승군을 지휘하거나 비가 올 때 승군을 교육시키던 장소로 쓰였다. 1800경부터 60여 년 동안 조정에 닥종이를 바쳐야 하는 부역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대체적으로 옥천사는 오랫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다 1950년 단행된 농지개혁 때 사찰 소유의 논밭이 단 한 평도 남기지 않고 모두 소작인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사세는 급격히 기울게 된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해도 옥천사의 권위는 손상을 입지 않았고, 오히려 불교정화운동의 선구자 청담대종사가 출가한 사찰로서 이 일대 불교 정신사의 중심축을 맡아 왔다. 그만큼 찬찬히 둘러볼 만한 자격이 있는 절집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옥천사 주차장이 귀한 문화유산을 보관하고 있는 보장각 앞에 위치한 까닭에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보장각 앞에 차를 세워 두고 자방루 앞마당을 거쳐 절집으로 들어선다. 따라서 일주문은 그렇다 쳐도 사천왕문 지나 맑은 계류를 건넌 뒤, 좌우로 편박나무 우거진 계단을 올라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물인 자방루를 보고, 오른편의 해탈문을 통해 대웅전 앞마당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중 중요한 앞부분이 생략되었다. 즉 주차장을 사천왕문 아래가 아니라 보장각 앞에 만듦으로 해서 사바에서 벗어나 화엄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차분히 둘러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 ▲ 운흥사는 보물로 지정된 괘불과 궤로 유명한 절집이지만, 무엇보다도 아담하게 조성한 장독대가 눈에 확 띈다.
- 한편, 옥천사 경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성은 불교가 상당히 흥한 지역에 속한다. 산마다 적지 않은 사찰과 암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옥천사와 더불어 둘러봐야할 절집으로는 문수암, 운흥사, 그리고 계승사를 꼽을 수 있다.
일반에게 많이 알려진 절집은 바로 삼국시대 화랑들 수련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 무이산(548.5m) 기슭의 문수암(文殊庵)이다. 아마도 유명세로만 따지면 옥천사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인데, 고성 사람들뿐만 아니라 진주·마산 등 인근 주민들도 아주 즐겨 찾는다. 문수암에서 내려다보면 약사전의 동양 최대라는 금불상 너머로 호수 같은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큰 흡인력인 듯. 다도해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연출하는 자연의 향연도 아름다운 풍경화다.
그런데, 문수암은 가파른 자연 지형을 잘 살려지은 전각들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콘크리트로 지은 암자와 전각의 배치는 운치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의상이 창건 당시 관음보살이 현현했다는 석벽, 청담선사의 사리탑, 그리고 6공 시절 설악산 백담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배지로 결정되기에 앞서 당시 그의 오른팔이던 고성 마암면 출신의 허문도씨가 답사했다는 절집이라는 소문과 맞물려 제법 유명해졌다.
영현면의 계승사(桂承寺)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불법보다 고고학적으로 더 관심을 끄는 절집이다. 우선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산길로 들어가는 과정도 호젓해서 좋거니와 암반을 깎은 터에 제비집처럼 당우를 앉혔는데, 석벽의 백악기 퇴적층리(천연기념물 제475호)는 비전문가가 봐도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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