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파타고니아(상)] 우리도 풍경 속 네 마리 동물이 됐다
- 지구의 땅끝(Fin Del Mundo)-.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 파타고니아의 파이네(Torres Del Paine) 중앙봉에서 석문과 나는 하늘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었다. 스피노자가 우주를 신, 또는 자연이라 일컬었을 때 우린 산을 통해 ‘위’에서 이상이라는 세상 밖의 세상으로 여행했고, ‘아래’의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자연 속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세상 안의 세상으로 떠나려한다. 파이네 산군 탐사다. 이어서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섬을 돌아볼 것이다. 누구나 원정등반이 끝나면 푸짐한 음식과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그리고 뜨거운 샤워 후의 맥주 한 잔이 간절하다. 제 아무리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피곤한 몸으로 다시 너덜길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님을 우린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이미 등반이 시작되기 전, 노시철 대장에게 정상에 서든 못 서든 간에 ‘이것은 싫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상의드렸었다. 단지 수정된 계획은 고요의 계곡에서 프란세스 계곡으로 연결시키는 루트는 자일과 장비를 사용해야함으로 원정대 네 명이 함께할 수 있는 파이네 라운드(Paine Circuit) 트레킹으로 바꿨다.
- ▲ 구아르다스 캠프장에서 페오에 산장(Refugio Lago Pehoe)까지 펼쳐지는 그레이 빙하의 하얀 얼음 절벽이 무너져 라운드 트레킹이ㅡ 백미를 이룬다.
- ‘칼라파테 열매를 먹으면 다시 돌아온다‘ ABC에서 BC로 내려오던 날 오후에 바로 각자 40~50kg씩을 메고 칠레노 캠프로, 다음날 추적거리는 비를 맞으며 오스테리아 라스 토레스(Hosteria Las Torres) 캠프장으로 철수했다. 반나절 시간이라도 아껴야했고 서둘러서 짐을 분류하고 재포장했다. 점심으로 라면을 먹으면서 노 대장은 걱정스레 묻는다. “거리가 얼마나 돼?” “라운드에, W(더블유) 코스까지 연결하면 한 125km 정도 되죠.” “며칠만에 돌 건데?” “4일 정도요.” 일수를 약간 줄여 대답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노 대장이 “그럼 하루에 30km 이상을 걸어야 하잖아”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지리산에서 15년 가까이 산 경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고난을 그는 미리 예견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너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밤 11시에 어두워지는데 저녁 먹고도 쉬엄쉬엄 서너 시간 더 가죠, 뭐.” 농담조로 대답하고 말았다. 이 대답에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영복형의 얼굴은 굳어졌고 석문은 소풍 전날의 들뜬 얼굴로 대조를 이뤘다.
- ▲ 평원과 페오에 호수 위로 직사각형의 테이블랜드처럼 불쑥 솟은 파이네 암봉군은 아직도 짙은 구름인데 아래쪽은 쾌청이다.
- 평원 위로 직사각형의 테이블랜드처럼 불쑥 솟은 파이네 암봉군은 아직도 짙은 구름인데 아래쪽은 쾌청이다. 나른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나흘간의 배낭을 짊어졌다. 파릇한 풀과 야생화가 산들거리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낮은 언덕을 올라 산허리를 감싸고돈다. 국립공원 안의 트레일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시간 단위로 표지판도 나타난다. 가는 길섶마다 노란 민들레, 빨간 물감통에 물방울이 뛰어오른 듯 왕관 모양의 시루엘리요(Ciruelillo), 꽃대가 긴 흰 야생국화, 땅바닥에 붉은 앵두 모양의 열매를 맺은 무르티야(Murtilla)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사이 사이로 높은 키의 남극너도밤나무 코이퀘, 렌가(Lenga), 니레(Nirre)의 잎들이 하늘거렸다. 석문은 가시덤불 관목에 열린 버찌 모양의 칼라파테(Calafate)를 따먹었다. 그 맛은 앵두와 체리 맛이 난다. “석문아, 칼라파테가 무슨 뜻인지 알지?” “예, 다시 되돌아오면 되죠, 뭐.” 진심인 것 같았다. “너, 많이 먹으면 한국에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명희(최석문씨 아내) 하고 보건(아들)이 안보고 싶어?” “형은 걱정도. 다음번엔 보건이하고 명희 다 같이 오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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